[전문가 칼럼] ‘빨리빨리, 대강대강, 끼리끼리’도 진화할 수 있을까?

2015/10/13 by 안중우
공유 레이어 열기/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전문가 칼럼 '빨리빨리, 대강대강, 끼리끼리'도 진화할 수 있을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국내 최고 전문가의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보세요. 매주 화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안중우 성신여대 청정융합과학과 교수


 

빨리빨리, 대강대강, 그리고 끼리끼리. 제목 보고 고개 갸웃거리셨죠?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제 생각에 이 단어들은 21세기(도 무려 15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가장 간명하게 묘사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딱히 긍정적인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도 아닐 겁니다.

 

‘에스컬레이터 두 줄 서기’ 캠페인의 패인(敗因)

아닌 게 아니라 우리 국민은 뭐든 ‘빨리빨리’ 합니다. 빨리 먹고 빨리 걷죠. ‘이러다 빨리 죽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나옵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성큼성큼 빨리 걷습니다. 왼편은 비워두고 오른편에만 서있습니다. 빨리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주는 거죠. 오죽하면 나라에서 지난 2007년부터 장장 8년간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시행해온 ‘두 줄 서기’ 캠페인을 포기했겠습니까. 사실 ‘에스컬레이터 오른쪽 사람들’이 길을 터주는 건 타인에 대한 배려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쁠 때 본인이 빨리 가야 했던 날의 답답함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죠.

시계 위를 뛰어가는 남자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걸어 올라가는 남자의 사진입니다.

그뿐인가요. 우리 국민은 뭐든 ‘대강대강’ 합니다. 건물도 대강 올리고 교량도 대강 지으며 도로도 대강 놓죠. 공부도 대강 하고 밥도, 국수도 대강 씹어 삼킵니다. 매뉴얼도 대강 만들고 그 매뉴얼조차 대강 지킵니다. 그 결과, 건물이 무너지고 여기저기서 안전사고가 발생합니다. 대강대강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습니다. 대강대강 전문가는 또 왜 그리 많은지요. 물론 대강대강의 결과로 결정적 순간에 해결책을 내놓는 ‘전문가’는 찾기 힘듭니다. 대신 이런저런 ‘관계자’만 넘쳐나죠(사실 빨리빨리와 대강대강은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빨리 하려면 대강 해야 하고, 대강 하면 빨리 할 수 있으니까요).

부서져 구멍이 난 벽입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뭐든 ‘끼리끼리’ 합니다. 혈연∙지연∙학연 등 매사 온갖 인연을 들이댑니다. 진부하긴 하지만 이런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니 말 다 했죠.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못 바꾼다!’ 각종 ‘연(緣)’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은 앞다퉈 돈세탁 하듯 학력을 세탁합니다.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말 중엔 ‘출신’이란 것도 있습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서로 다른 두 은행이 합병을 거쳐 새롭게 출범할 때도 ‘본래 어느 은행 출신이었는지’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허겁지겁’과 ‘얼렁뚱땅’, ‘우리끼리’에서 탈출하기

빨리빨리와 대강대강, 그리고 끼리끼리. 어쩌면 우린 이 세 가지 태도 덕분에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뤘는지 모릅니다.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의 변화는 사실 대단한 겁니다. 정작 우리 국민들은 (매일 어머니가 해주시는 ‘집밥’ 귀한 줄 모르듯) 대수롭잖게 여기지만 해외에선 우리나라의 위상 역전을 두고 ‘난리가 아니게’ 놀랍니다.

국내외 여건이 여러모로 안 좋다고 합니다. 여차해 중국이 잘못되면 192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처럼 될 수도 있다네요. 대공황이 뭔지 겪어본 사람 중 지금껏 경제활동을 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경험해본 사람이 사실상 없다는 얘깁니다.

바야흐로 ‘인더스트리(Industry) 4.0’ 시대입니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뜻입니다. 좀 더 어려운 말로 우린 ‘한계비용 제로(0)’에 도전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제안은 어떨까요. 일명 ‘빨리빨리, 대강대강, 끼리끼리 2.0 시대’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빨리빨리 2.0’은 ‘빨리빨리’와 ‘허겁지겁’의 차이를 아는 겁니다. 빨리빨리 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건 빠뜨리지 않는 거죠. 이 넓은 세계에 우리처럼 뭐든 빨리 해내는 국민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뭘 좀 해보려 시도했던 분이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매사 뭐가 그렇게 느려 터지는지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테니까요.

QUICK RESPONSE

사실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소중한 자원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제공되지만 저축할 수도, 영수증을 달랄 수도 없죠. 그렇다고 다른 자원처럼 폐기물을 남기지도 않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 ‘시간’이란 자원의 가치를 너무도 잘 알기에 열심히, 빨리빨리 살아온 겁니다. 배달문화만큼은 우리가 세계 으뜸이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빨리빨리 2.0’은 신속(하고도 정확한) 대응입니다.

‘대강대강 2.0’은 ‘대강대강’과 ‘얼렁뚱땅’의 차이를 아는 겁니다. 대강 하되 중요한 일은 챙기는 겁니다. 우선순위를 지키고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따르는 것 따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대강대강엔 ‘적당’과 ‘적절’이란 긍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엔 대강대강 만드는 게 좋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를 아날로그 카메라처럼 대(代)를 물려 사용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그건 ‘오버스펙(over-spec)’입니다. 수십 년 사용하던 유선전화를 기준으로 몇 년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죠.

다이얼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전기자동차의 핵심이 배터리라면 머지않아 ‘배터리 다 됐을 때 바꾸는 자동차’가 나올 겁니다. 삼사 년 탈 전기자동차를 20년쯤 거뜬히 사용하는 내연기관 자동차처럼 만든다면 그 역시 오버스펙 아닐까요? ‘언더스펙(under-spec)’도 곤란하지만 오버스펙 역시 소중한 자원을 올바로 사용하는 모양새는 아닙니다. ‘오버’도, ‘언더’도 아닌 적절한 기술을 저개발(혹은 개발도상)국가에 제공하자는 게 일명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의 정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강대강 2.0’은 ‘적절(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대응’입니다.

‘끼리끼리 2.0’은 ‘동질 간 끼리끼리’와 ‘이질 간 끼리끼리’의 차이를 아는 겁니다. 끼리끼리의 동심원을 조금만 크게 키워보는 거죠. 이를테면 단일민족의 끼리끼리에서 다문화 사회로의 끼리끼리로 말입니다. 인문학과 사회학, 공학과 과학이 끼리끼리 뭉쳤다면 이번엔 이들이 서로서로 끼리끼리 어우러지면 어떨까요? 경제끼리, 환경끼리 어울렸다면 각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끼리끼리도 흥미로운 조합이 될 겁니다. 그게 바로 환경∙경제 효율성입니다. 예나 지금이나(그리고 미래에도) 시장 안에 환경이, 환경 안에 시장이 각각 존재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끼리끼리 2.0’은 ‘(경계를 허무는) 융∙복합’입니다.

여러 사람이 손을 잡고 사회를 구성하는 사진입니다.

 

‘잠시 빌려 쓰는’ 환경, 오래도록 잘 보전하기 위해

‘빨리빨리, 대강대강, 끼리끼리’ 2.0 시대를 열자는 제 제안에 부디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겐 반만 년의 역사를 거치며 조상에게서 물려 받은 훌륭한 DNA가 있습니다. 그리고 후손에게서 잠시 빌려온 환경이 있죠. 아무쪼록 이들을 길이 보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안중우

성신여대 청정융합과학과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3기)

기획·연재 > 오피니언

기획·연재 > 오피니언 > 외부 기고

삼성전자 뉴스룸의 직접 제작한 기사와 이미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 뉴스룸이 제공받은 일부 기사와 이미지는 사용에 제한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뉴스룸 콘텐츠 이용에 대한 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