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지도’조차 없이 헤매는 기업 정보시스템

2014/12/05 by 문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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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


정보화(情報化)의 최종 산출물은 결국 ‘프로그램 덩어리’와 ‘데이터 덩어리’ 두 가지다. 기업 정보시스템엔 수많은 데이터, 그리고 이를 통제하는 프로그램들이 기업 활동에 유용한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공존한다.

빅데이터를 형상화한 이미지입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정보시스템을 갖출 때 프로그램 부문은 ‘짜다(set up)’란 표현을 쓸 정도로 공들여 작업하지만 데이터 부문으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정반대다. 데이터 제작·설계 업무를 등한시해 빚어지는 업무 효율의 저하와 비용 문제 등 불상사는 한둘이 아니다.

데이터는 사람으로 따지면 성명이나 나이, 주소 같은 것이다. 은행을 예로 들자면 계좌번호를 비롯한 각종 고객정보가 대표적 데이터다. 데이터의 세계는 단순하고 쉬운 것 같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보시스템을 구축하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다. IT 분야에서 데이터베이스처럼 이론이 정교하게 깔려 있는 분야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엉터리’ ‘쓰레기’ 넘쳐나는 기업 데이터베이스

아쉽게도 기업 현장에 나가보면 데이터베이스 설계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담당자가 수두룩하다. 겉으론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자기 회사의 정보시스템이 얼마나 수준 이하인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 기업의 데이터베이스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론 이론에 따라 데이터를 설계했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엉터리 데이터 천지다.

단언컨대 2014년 12월 현재 우리나라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 가운데 쓸 만한 건 많아야 40%가량이다. 나머지 60%는 기업 활동과 고객 서비스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당장 버려야 하는 ‘디지털 쓰레기’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쓰레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파일들이 쓰레기통에 담겨 있는 이미지입니다.

문제는 기업들이 “데이터 처리 속도 부문에서 일정 성과를 거두려면
데이터 품질이 다소 훼손되는 건 감수해야 한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완벽한 난센스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정보화시대의 화두는 ‘속도’와 ‘품질’이다. 일반적으로 속도를 중시하면 품질은 다소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품질만 강조하면 속도는 느려진다. 반면, 컴퓨터는 속도와 품질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만큼 고도의 연산능력을 자랑한다.

문제는 기업들이 “데이터 처리 속도 부문에서 일정 성과를 거두려면 데이터 품질이 다소 훼손되는 건 감수해야 한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완벽한 난센스다.

 

설계 과정 생략하고 ‘묻지마 시공’ 하는 격

데이터 품질 저하 문제는 ‘덮어놓고 아무거나 데이터로 취급하는’ 업계 관행에서 비롯된다. 데이터는 등급별로 나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게 기본이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데이터는 철저하게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기업 현장을 돌아본 결과, 제대로 된 데이터 감별사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데이터를 올바르게 감별하지 못한다면 지도도 없이 망망대해 같은 데이터 세계를 항해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해 ‘전사적 데이터 지도’의 확보 여부는 기업 정보시스템 전체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수많은 데이터 앞에서 원하는 데이터를 찾으려는 모습의 사진입니다.

데이터를 올바르게 감별하지 못한다면 지도도 없이 망망대해 같은 데이터 세계를 항해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해 ‘전사적 데이터 지도’의 확보 여부는 기업 정보시스템 전체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전사적 데이터 지도는 전국교통지도처럼 한눈에 도로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제작돼야 한다. 단 하나의 길도 뚝 끊어져선 안 된다. 데이터가 오가는 길 역시 잘 닦인 도심 도로처럼 빠른 시간 안에 왕복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기업은 데이터 지도가 없고, 그러다 보니 정보시스템 설계 역시 주먹구구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건물을 지을 땐 설계 작업을 마친 후 시공에 들어가는 게 정석이다. 기업 정보시스템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기업은 정보시스템 설계 작업을 등한시한 채 곧바로 시공에 착수한다. 설계가 대충대충이니 정보시스템은 허술하고, 그런 시스템에서 산출된 데이터 품질이 좋을 리 없다. 악순환이다.

일부 기업은 ‘데이터 응답 속도 개선’을 거창하게 표방한다. 하지만 실상은 온갖 땜질식 처방만 화려하게 동원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차세대 정보시스템 개발’이란 미명 아래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각종 정보화 개선 프로젝트를 가동시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데이터의 속도와 품질 개선은 뒷전이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에만 혈안이 돼 있는 게 현실이다.

 

갈 길 먼 ‘3초룰’… 데이터 중심 사고 전환 시급

3초룰을 형상화한 것으로 컴퓨터 앞에 시계가 놓여 있는 사진입니다.

미국 금융업계에서 통용되는 법칙 중 일명 ‘3초룰(three-second rule)’이란 게 있다.
‘정보시스템에 어떤 질문이 들어가든 3초 이내에 답이 나와야 한다’는 게 이 법칙의 핵심이다.

 

미국 금융업계에서 통용되는 법칙 중 일명 ‘3초룰(three-second rule)’이란 게 있다. ‘정보시스템에 어떤 질문이 들어가든 3초 이내에 답이 나와야 한다’는 게 이 법칙의 핵심이다. 실제로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이 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3초 이내에 정확한 답을 도출하지 못하면 해당 정보시스템은 ‘총체적 실패작’으로 규정된다. 이 경우, 시스템 개발을 맡은 용역 업체는 계약 내용에 따라 개발비 전액을 BoA 본사에 환불해야 한다.

자, 이제 시선을 우리 기업 정보시스템 쪽으로 돌려보자. 정답을 이끌어낼 때까지 30초는 고사하고 300초, 심지어 3000초를 넘기는 일도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3초룰 같은) 제한시간 규칙 적용 기업이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조차 없다.
금융 기업의 차세대 정보시스템 구축에 소요되는 예산은 어림잡아 5000억 원 선이다. 천문학적 금액이 투입되는 정보시스템 개발에 응답 시간 제한 규정이 없고 문제 발생 시 책임조차 물을 수 없는 현실은 현행 기업 정보시스템 구축 작업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기업이 데이터를 중요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많은 데이터들을 관리하는 듯한 모습의 사진입니다.

기업 정보시스템에서 프로그램 문제로 정답 도출이 늦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데이터 설계 시 발생한 치명적 하자’가 그 원인이다. 요컨대 ‘프로그램 중심’의 현행 사고를 ‘데이터 중심’으로 하루빨리 바꾸지 않으면 기업 정보시스템은 영원히 애물단지 신세를 벗지 못할 것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문송천

KAIST 경영학과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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