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창의력에도 먹이가 필요하다

2015/03/06 by 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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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몇 년 전 할리우드가 인정한 ‘시나리오 작법과 스토리텔링의 대가’ 로버트 맥키(Robert McKee)의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스토리텔링 세미나라고 하면 시나리오·드라마 작가에게나 필요한 거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좋은 스토리를 쓰기 위한 원칙은 스크린을 넘어 제품 개발과 마케팅, 디자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창조(자)란 굴레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순간이 오면?

크리에이터들이 겪는 가장 끔찍한 악몽 중 하나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고 더 이상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일 것이다. 이에 대한 로버트 맥키식(式) 처방은 단호하다. “지금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라!”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 건 지식의 ‘밑천’이 떨어진 탓이니 산책을 하거나 지칠 때까지 책상 정리를 하지 말고 공부에 매진하란 뜻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영감이 저절로 생겨날 리 없다. 다시 말해 ‘창의력에도 먹이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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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감은 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 걸까? 창조를 위한 먹이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영국 출신의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Paul Smith)는 이렇게 말했다. “디자인에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 눈을 쉼 없이 사용한다. 카피하는 건 어제 신문을 사는 것과 같다. 그냥 보지 말고, 응시하고 관찰해라. 영감은 음악과 미술 등 모든 것에서 얻을 수 있다. 만약 영감을 얻지 못했다면 그건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위더(Robert Wieder)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런 얘길 했다. “누구나 옷가게에서 유행을 파악하고 박물관에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창조적인 사람은 철물점에서 역사를 읽고 공항에서 유행을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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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잘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스트리아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자신을 인설턴트(insultant, ‘insult’와 ‘consultant’의 합성어로 ‘모욕하는 사람’이란 뜻)라고 표현할 만큼 고객에게 까다롭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질문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읽어내는 방법이고, 알수록 궁금한 게 많아지는 건 진리다. 또 너무 아는 게 없거나 관심이 없어도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 궁금하지 않으면 질문이 떠오를 리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질문엔 ‘기술’이 아니라 ‘호기심’이 필요한데, 일단 보고 듣고 충분히 알아야 호기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진심으로 궁금하지 않은데 당장 뭔가 해야 하고 만들어내야 하니까 손쉬운 방법으로 모방을 선택하거나 최대한 안전한 결과물을 추구하게 된다.

 

‘모두가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화두는 아마도 ‘창조(creativity)’일 것이다. 오늘날 창조는 더 이상 디자이너나 예술가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온라인 서점에서 크리에이티브나 상상력, 창의성 같은 단어로 검색하면 수백 권의 책이 쏟아진다. 직원 창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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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디자이너 겸 심리학자 프랑크 베르츠바흐(Frank Berzbach)의 책 ‘창조성을 지켜라’(안그라픽스)에 따르면 심리학자들은 창의성을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새롭고 적당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책엔 “창의성은 개인에 대한 개념뿐 아니라 작업 수단과 업무 환경 같은 조건까지도 포함한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 정의를 접하니 창의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좀 과장돼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때와 매뉴얼을 따라야 할 때를 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지혜도 중요하다.

창조의 정의와 의미도 이해관계와 분야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 대다수는 ‘창조’라고 하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개념이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막연하게,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 새로운 걸 원할까? 그저 새롭기만 하면 익숙하지 않아 오히려 외면 당하기 쉽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건 영 낯설어 적응이 안 되고, 반대로 시종일관 익숙하면 진부하다는 소릴 듣기 일쑤다. 까다로운 사람들의 취향을 맞추느라 크리에이터는 이래저래 고달프다.

 

“10배 이상 더 쓰고 그 중 90%는 버려라”

사람들은 아침에 눈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온갖 광고 메시지, 다양한 제품과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산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이디어가 있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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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키는 작가가 상투성의 함정에 빠지고 막막한 벽에 가로막히는 이유에 대해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 속 세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충분한 지식 없이 일을 시작하다보니 금세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설정이 비슷한 영화·드라마·소설을 참고하기 시작하며, 결국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어디서 접한 것 같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맥키는 “진부함의 악순환을 피하려면 이전보다 10배 이상 더 쓰고 그 중 90%를 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독창성(originality) 없이 지어낸 얘길 두고 흔히 “콘텐츠가 빈약하다”고 말한다. 맥키는 자신의 책 ‘스토리: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민음인)에서 원형(原型)과 전형(典型)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원형적 이야기는 현실의 구체성에서부터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들어올린 후 그 내부를 개성적이고 독특한 문화적 표현으로 감싼다. 전형적 이야기는 이와 반대로 내용과 형식 모두 빈곤에 허덕인다.”

 

창의성보다 중요한 건 ‘뒷심’과 ‘끈기’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좋은 디자인, 좋은 콘텐츠로 인정 받는 제품은 “원형을 창조해냈다”는 카리스마를 갖는다. ‘끝내주는 아이디어’는 세상에 너무 많다. 오히려 창의성 자체보다 중요한 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며 전략적으로 밀고 나가는 뒷심과 끈기일 것이다.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고 하는 사회 분위기에선 겉보기에 엇비슷한, 급조된 창의성 속에 도사린 진부함과 통속성을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뭔가를 창조하는 것 자체가 당장 돈으로 바꿀 수 있거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창조나 혁신을 주제로 한 세미나 몇 번 참석한다고 당장 창의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게 아닌 것처럼 때론 모험도 하고 투자도 하며, 실패도 참고 기다려줘야 한다. 당장은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일단 공들여 쌓은 건 쉬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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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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