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햄릿은 정말 ‘고뇌하는 지식인’일까?

2015/02/04 by 김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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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평범한 삶을 살던 어느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현관문을 열었더니 소포가 하나 배달돼 있었다. 그 안엔 버튼 장치를 갖춘 작은 나무상자가 있었다. 얼마 후 자신을 ‘집사’라고 칭하는 사람이 부부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실험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만약 이 단추를 누르면 당신은 5만 달러를 받게 되고, 그 대신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죽게 됩니다.”

 

5만 달러의 유혹, 당신의 선택은?

아버지와 아들이 낚시를 즐기는 모습

부인은 이 황당한 제안을 두고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아내의 말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부인 생각은 달랐다. “만약 누군가가 죽더라도 내가 모르는 사람이잖아. 그 돈이 생기면 오래 꿈꿔왔던 유럽 여행도 갈 수 있어. 돈 때문에 미뤄온 아이도 가질 수 있을 거야. 이건 우리 가족을 위한 기회야.”

부인은 며칠 고심한 끝에 남편이 집에 없는 틈을 타 단추를 눌러버렸다.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 부인은 한편으론 안심이 됐고, 또 한편으론 맥이 빠졌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남편이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떨어지며 달리는 전철에 치여 죽었다는 것.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르는 사람이 죽는다고 했잖아!”

몸서리치던 부인에게 불쑥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남편 이름으로 들어둔 5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바로 그때,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나무상자를 전한 집사의 전화였다. 부인은 거칠게 따졌다. “당신, 내가 모르는 사람이 죽는다고 했잖아요!” 집사가 말했다. “부인, 당신은 정말로 남편을 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고뇌하는 지식인’ vs. ‘잔혹한 무사’

햄릿 동상

이 이야기는 미국 작가 리차드 메드슨(Richard Matheson)의 단편소설 ‘버튼 버튼(Button, Button)’의 줄거리다. ‘더 박스(The Box, 2009)’란 이름으로 영화화까지 된 작품이다. 몇 달 전, 우연히 들른 번역가 홍종락씨 블로그에서 이 소설을 알게 된 후 급히 번역판을 구해 읽었다. 이 짧은 소설은 ‘우린 주위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사람을 안다는 게 무엇인가?’란 질문을 가혹하게 던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정말 제대로 알까? 상사나 부하, 동료의 참모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때마침 이 질문을 자문자답할 기회가 생겼다. 원인을 제공한 건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이었다. 최근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 푹 빠져 ‘다시 읽기’ 중인데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도 햄릿은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얼마 전 다시 만난 햄릿은 중학생 때, 그리고 대학생 때 알았던 그 햄릿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껏 햄릿은 ‘사색형 인간’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묘사돼 왔다. 당연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만난 햄릿은 결코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서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용의주도하고 충동적이며 잔인하기까지 한 무사(武士)였다. 날 포함해서 이 유명한 희곡을 여러 번 읽은 사람, 또 연극을 여러 번 봤다는 사람들조차 왜 햄릿을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죽느냐 사느냐…”의 굴레에 갇히다

미로에서 고민하는 모습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 후 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제대로 읽지 않고 읽은 척했다. 둘째,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고뇌하는 햄릿’만을 떠올리며 인물이 지닌 복합성을 간과했다. 셋째,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란 명대사가 워낙 널리 강조된 탓에 책을 읽기도 전 ‘고민하는 햄릿’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자, 이쯤 해서 햄릿의 세 가지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자. 우선 첫 번째 장면. 햄릿은 왕과 왕비 앞에서 국왕 살해 사건 소재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 그런 후 관객 반응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리고 왕비, 즉 어머니를 추궁한다. 그때 ‘오필리어’의 아버지이자 왕의 충직한 신하 ‘콜로니어스’는 커튼 뒤에서 햄릿과 왕비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두 사람의 대화가 점점 더 격해지자, ‘이러다간 왕비의 안전이 위험할 것’이라고 여긴 콜로니어스는 소리를 지른다. 바로 그 순간, 햄릿은 칼을 뽑아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휘두른다. 물론 소리가 난 쪽에 왕이 있는 줄 알고 저지른 행동이다. 게다가 시체는 암매장해버린다. 여기, ‘고뇌하는 햄릿’이 어디 있는가?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존재할 뿐이다.

다음, 두 번째 장면. “햄릿이 왕위 찬탈의 의도를 갖고 수상한 행동을 벌인다”고 생각한 왕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제거할 목적으로 영국에 보낸다. 햄릿과 동행한 두 친구 손엔 ‘햄릿이 영국에 도착하는 대로 죽여라’란 내용의 칙서가 들렸다. 하지만 햄릿은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챈다. 그는 왕의 칙서를 훔친 후 조작, 오히려 칙서를 갖고 간 두 친구가 자신들을 스스로 제거하란 내용의 편지를 전달하게 만든다. 명석한 상황 판단과 과감한 작전, 배반을 용서치 않는 잔혹한 전략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 장면. 햄릿은 클로디어스가 혼자 있는 걸 알고 죽이려 다가간다. 하지만 우연찮게 클로디어스가 기도하는 모습을 본 후 죽이지 않기로 한다. ‘기도하다 죽으면 천당에 갈 수도 있으므로 확실하게 지옥에 보내려면 악을 행하고 있을 때 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서 말이다. 아주 신중하게, 매사 계산된 행동을 하는 복수자(revenger)의 모습이다.

 

사람의 진면목 알아보는 법

쌍안경을 들고 있는 여인

사람은 타인을 자신의 잣대로 단순화, 정형화시키는 버릇이 있다. 복잡한 사안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생각하는 비용’이 한결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을 둘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왼쪽과 오른쪽,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천사와 악당…. 이 같은 ‘구분 짓기’ 습관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을 추구한다’는 핑계 뒤에 숨어 사람 판단하는 일을 허투루 해선 안 된다.

전면적으로 나쁜 사람,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있을까? 셰익스피어가 그린 햄릿의 캐릭터만큼이나 사람은 매우 입체적이며 복잡한 존재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사람의 진면목을 보는 방법이란 게 과연 존재하는 걸까? 회사든 학교든 사회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다. 어떤 사람을 사귀고, 어떤 사람을 쓰고,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 제대로 판단하는’ 눈을 갖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이와 관련, 공자는 일찍이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서 ‘사람의 진면목 알아보는 법’을 말했다. “視其所以(시기소이) 觀其所由(관기소유) 察其所安(찰기소안) 人焉廋哉(인언수재)”가 그것이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그의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이 비롯된 이유를 관찰하고, 그가 편안해하는 걸 자세히 살펴 성찰하면 어찌 그 사람됨을 감출 수 있겠는가?” 정도가 된다.

보는(視) 것은 관찰(觀)하는 것만 못하고, 관찰(觀)하는 것은 성찰(察)하느니만 못하다. △사람의 행동엔 일정한 ‘패턴’이 있으며 △그 형태를 관찰하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어떨 때 뭘 좋아하는지 곰곰이 살펴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값진 메시지다.

 

때때로 진실은 ‘섬뜩한’ 것

고민하는 남자

햄릿의 마지막 부분, 햄릿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충복(忠僕) ‘호레이쇼’는 독검에 베여 죽어가는 햄릿을 따라 자결할 생각으로 남은 독배를 마시려 한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햄릿의 대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더없이 명확하게 보여준다.

“잔을 주게. 손을 놔. 이리 달라니까. 오, 호레이쇼! 어떤 누명이 남을지도 몰라. (중략) 자네가 진정으로 날 위해준다면 하늘의 축복을 잠시 멀리하고 이 험한 세상에 사는 고통을 참아가며 나에 대한 얘길 전해주게.” 그에게 우정이나 사랑은 전혀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덴마크 왕자 햄릿’에게 가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자기가 한 일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 그래서 당당히 역사 속 주인공으로 기록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햄릿이 영웅으로 남았는지와 별개로 그와 함께 일한 사람, 그의 친구나 연인은 참으로 불쌍하다.

이제부터라도 선입견을 털어내고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꼼꼼하게 관찰하자. 지금껏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 당신 앞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순진하다고만 생각했던 친구의 모습에서 냉철한 전략가의 풍모를 찾을 수도, 그저 어머니라고만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천생 여자를 발견할 수도 있다. 섬뜩한가? 진실이란 때로, 섬뜩한 것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김무곤

동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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