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파스타에 관한, 당신이 미처 몰랐을 이야기

2015/08/21 by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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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모로우 에세이] 파스타에 관한, 당신이 미처 몰랐을 이야기[투모로우 에세이] 파스타에 관한, 당신이 미처 몰랐을 이야기. 여러분의 취향에 맛과 멋을 더해줄 에세이스트 8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매주 목금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찬일 셰프


 

#프롤로그_대륙 간 문화, 푸질리 매듭으로 묶이다

모든 문화는 바다를 건너거나 ‘바다에 버금가는’ 대륙을 이동하며 전파된다. 실크로드의 경우 바다는 아니었지만 바다보다 더 건너기 어려운, 험난한 길이었다. 실크로드가 인류 문명사에서 각별히 중시되는 건 그만큼 어려운 길을 교통하며 문화를 전달하고 이식했기 때문이다. 쉽게 건널 수 있는 길이었다면 애초 대상(大商)들이 목숨 걸고 높은 이윤을 바라며 굳이 건너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스타는 스파게티(이탈리아어로 ‘줄’이란 뜻)를 써서 바다, 혹은 대륙 너머의 서로 다른 문화권을 푸질리(짧은 리본처럼 생긴 파스타) 모양의 매듭으로 묶었다. 파스타의 역사엔 마르코폴로가 말한 ‘중국-이탈리아반도 간 파스타 전래설’(훗날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다), 아랍권의 시칠리아 전래설(이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절대 ‘설(說)’이랄 수 없는 미국으로의 진출, 여기에 ‘동양의 두 나라’ 일본과 한국으로 전래되기까지의 여러 나라의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

리본 모양으로 커팅된 파스타의 모습입니다.

 

#1_토마토소스는 원래 ‘파스타용’이 아니었다?!

파스타에 곁들여지는 대표적 소스는 뭐니 뭐니 해도 토마토다. 토마토는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래된 채소다. 처음엔 관상용으로 쓰였고(빨갛고 동그란 게 얼마나 예쁜지!) 이후 ‘악마의 열매’란 비난 속에서도 마치 토마토의 붉은색처럼 유럽을 물들여갔다. 특히 이탈리아 요리사들은 토마토를 이용해 새로운 ‘반도 요리 문화’를 만들어갔다.

토마토가 파스타 소스로 ‘변신’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실제로 이탈리아반도 사람 대부분이 ‘토마토소스 넣은 파스타’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18세기가 다 돼서였다. 정작 토마토소스를 세계화시킨 건 미국인이었다. 미국인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이탈리아 파스타와 소스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이어 축산업의 발달로 흔해진 쇠고기 부산물을 모아 일명 ‘민스드 비프 소스(minced beef sauce)’ 제조에 토마토를 쓰기 시작했다.

토마토 파스타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탈리아엔 ‘라구(ragù)’란 소스가 있었다. 토마토와 간 쇠고기로 만든 이 소스는 특히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 요리였던 토마토 미트볼이 미국에서 더 크게 성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토마토 미트볼은 경제 호황을 맞아 ‘일하는 미국인’의 욕망에 딱 맞춰 (집에서 간편하게 데워 먹을 수 있는) 통조림 형태로 선보여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요리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에 의해 일본으로 전파됐다. 한국에도 알려진 이 미트볼 토마토 스파게티는 아마 주한미군 점령이 그 전파 계기가 됐을 것이다.

미트볼이 올라간 토마토 파스타의 모습입니다.

미군은 수많은 물자와 문화를 세계 각국에 전파했다. 그 중엔 당초 이탈리아 것이었지만 미국식(式)으로 재해석된 것들도 있다. 파스타와 피자가 대표적이다. 이 걸출한 이탈리아산(産) 두 요리는 19세기, 봇물처럼 터진 남부 이탈리아인의 미국 이민에 의해 일약 세계화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수백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미국행(行) 배에 올랐다. 실제로 미국 야구 중계를 보면 꽤 많은 선수의 이름이 이탈리아식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부 선수는 얼굴 생김새도 이탈리아인을 연상케 한다. 그들의 조부모는 필시 칼라브리아나 시칠리아 같은 남부 이탈리아 출신일 것이다.

이탈리아는 1861년 통일됐지만 남북 간 지역 격차는 날로 심해졌다. 공업지대가 많은 북부와 달리 가난한 농업에 의존하던 남부의 기아(飢餓)는 자력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영화 ‘대부(The Godfather)’(1972)에서도 알 수 있듯 이탈리아인들은 3개의 ‘위대한 수출품’을 미국에 팔았다. 토마토와 파스타, 그리고 마피아가 그것이다(물론 우스갯소리다).

 

#2_일본엔 ‘스파게티맛 아이스크림’이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배 이후 미군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파스타 문화를 접했다. 그 시초는 19세기 후반 나가사키 개항 전후로 추정된다. 나가사키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인 바로 그 해안도시다. 일본인 여성과 미국인 남성의 사랑을 다룬 나비부인의 줄거리처럼 나가사키는 서양인의 활발한 출입으로 국제화된 곳이었다. 당시 수많은 서양인이 저마다 자국 음식문화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찍이 유럽 상인들이 카스텔라를 전파했듯 나가사키를 찾은 일부 선교사가 마카로니 공장을 이곳에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나가사키는 당시 천주교의 주요 전파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파스타는 꽤 고급 요리였다. 고급 양식당에서 취급됐으며 여느 일본 음식 메뉴의 10배 이상 가격으로 팔렸다고 한다.

나폴리탄 스파게티의 모습입니다.

일본의 파스타 문화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나폴리탄 스파게티다. 그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나폴리탄 스파게티 맛 빙과’가 있을 정도다. 먹어봤는데 정말 희한한 맛이었다(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짜장면 맛 빙과가 있다면 어떨까?). 나폴리탄 스파게티의 탄생엔 미 군정 시기 한 일본인 주방장의 일화가 숨어 있다. 도쿄에서 가까운 요코하마의 한 호텔에 미군이 군정 사무실을 마련했는데, 이 호텔 주방장은 토마토소스 대신 미군들이 갖고 온 케첩을 주재료로 스파게티 조리에 나섰다. 그게 오늘날 나폴리탄 스파게티의 시초였다.

나폴리탄 스파게티란 ‘(토마토가 유명한)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식 스파게티’란 뜻이다. 이탈리아어 정식 명칭은 ‘스파게티 알라 나폴레타나’다. 원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새롭게 바뀐 이 스파게티는 ‘일본 국민 파스타’의 위상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해당하는 쇼와(昭和)∙다이쇼(大正) 시대를 거치며 생겨난 일본풍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 팔기 시작하며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일약 전국적 지위를 누렸다.

 

#3_한국 파스타 문화의 시초는 ‘○○○○’

그렇다면 한국의 파스타 문화는 어떻게 이식됐을까? 우선 1888년 인천에 들어선 ‘우리나라 최초 호텔’ 대불호텔(현재 이 자리에선 파라다이스 인천호텔이 영업 중이다)에서 파스타 메뉴를 팔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인천은 개항해 각국의 조계지가 생겨난 국제도시였고 당연히 유럽인을 포함, 다양한 외국인이 드나들었다. 그런 만큼 파스타가 메뉴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1902년 서울에 손탁호텔(이토 히로부미와 처칠도 묵었다고 전해지는)이 생기고 이곳 양식당이 인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 여기서도 마카로니 같은 파스타가 분명 팔렸을 것이다.

마카로니를 활용한 스파게티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파스타가 본격적으로 이식된 건 일본과 마찬가지로 1945년 이후였다. 미 군정이 설치되고 미군에 의해 ‘미국화된 파스타 문화’가 전해진 것. 1960년대 여성지를 보면 ‘마카로니 요리’란 게 나온다. 미군들이 좋아했던 ‘마카로니 치즈’ 등을 흉내 낸 형태였을 것이다. 서울 도깨비시장, 부산 깡통시장, 인천 양키시장 등에선 파스타(주로 마카로니처럼 짧은 형태)를 담은 깡통 음식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와 ‘다이알 비누’ ‘레블론 샴푸’ ‘콜게이트 치약’ ‘땅콩버터’ 따위와 함께 유통됐다.

일본처럼 경양식 레스토랑이 성행한 것도 1960년대 이후 파스타의 국내 인기에 한몫했다. 당시 파스타는 주로 수입 마카로니가 마요네즈에 버무려진 샐러드 형태였다. 종종 ‘돈가스(포크 커틀릿)’에 곁들여지는 ‘가니시(Garnish)’로도 쓰였다. 1970년대 여성지에 ‘스파게티 만드는 법’이 등장하는 걸 보면 이 즈음 스파게티란 메뉴가 소개되고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걸로 추정된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파스타의 모습입니다.

한국 신문에 파스타란 용어가 처음 나타난 건 1974년이었다. 하지만 로마세계식량회 소식을 다룬 외신 기사였기 때문에 ‘우리 문화’로 받아들여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심지어 1984년 신문기사에 “피스타(이탈리아식 빈대떡)”란 오류가 등장하는 걸 보면 그때까지도 파스타의 정확한 의미를 상류사회에서조차 몰랐던 것 같다. 1962년 모 일간지에 “스파게티(이따리안 국수)”란 표현이 나오는 걸 보면 당시 스파게티는 꽤 널리 알려졌지만 파스타와 스파게티는 전혀 별개의 요리처럼 인식됐다.

마카로니 역시 제법 일찍 그 존재가 알려진 음식이다. 실제로 1935년 동아일보엔 나폴리발(發) 외신 형태로 “이탈리아군이 병력과 마카로니 2000포대를 싣고 전장으로 이동한다”는 기사가 게재됐다. 1937년 기사에 “수입 금지 품목에 마카로니가 포함됐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미뤄볼 때 마카로니는 이미 그 전에 수입돼 널리 유통됐던 걸로 보인다.


#에필로그_드라마 ‘파스타’, 한국 파스타 문화를 바꾸다

파스타는 ‘마카로니’란 이름으로 전해져 ‘스파게티’를 거쳐 비로소 (모든 면 종류를 일컫는 용어란) 제 이름을 찾았다. 그 과정에선 2010년 방영된 TV 드라마 ‘파스타’(MBC)가 적잖은 역할을 담당했다. ‘경양식집 메뉴 간이 파스타집 이탈리아 식당’으로 이어지는 유전을 겪고서야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의 또 다른 에세이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투모로우 에세이] 짜장면, 바다를 건너다

by 박찬일

셰프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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